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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익살스러운수정27 댓글 0건 조회 5회 작성일 2026-09-25 10:2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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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 자의식 과잉에 사로잡힌 이성이 집단화 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히스테리가 본능을 자극해 광기의 도파민을 소비하는 일련의 과정들​기사 작성 기준일: 2026년 9월 4일​[서론]본 좌담회는 현대 사회를 휩쓸고 있는 집단적 광기와 여론 형성의 근원적 메커니즘을 문명 비평과 심층 구조 분석의 관점에서 해부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표면적인 진영 논리나 단순한 현상 나열을 철저히 배제하고, 근대적 주체의 자의식이 어떻게 불확실성의 공포 속에서 과잉 진압을 시도하며, 그것이 어떻게 반향실 내부의 집단 히스테리와 원초적 본능 자극으로 추락하여 궁극적으로 플랫폼 알고리즘 위에서 도파민으로 소비되는지 그 참혹한 5단계의 구조적 병리를 추적한다. 이성의 역설과 도덕의 알리바이 속에 숨겨진 현대인의 야만성을 가장 적나라하고 지독한 시선으로 파헤친다.​[참석자 명단 및 소개]▣ [김어준 사회자]: 프레임의 설계자이자 본능적 언어의 타격가.▣ [김지윤 사회자]: 차가운 지성과 구조적 해설의 대가.▣ [손석희 아나운서]: 냉혹한 저널리즘적 이성으로 무장한 공격적 논객.▶ [오토 폰 비스마르크]: 철혈과 권력 역학의 화신.▶ [요제프 괴벨스]: 대중 심리와 선동의 마에스트로.▶ [홍대선 작가]: 역사의 맥락을 짚어내는 입체적 스토리텔러.▶ [버락 오바마 대통령]: 제도와 구조의 정치적 수사학자.▶ [김대중 대통령]: 인내와 통찰의 철학적 정치인.▶ [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와 무의식을 해체하는 정신분석학자.▶ [임마누엘 칸트]: 순수 이성의 비판적 건축가.▶ [프리드리히 니체]: 망치를 든 철학자, 이성의 기만을 부수는 자.▶ [구스타프 르 봉]: 군중 심리학의 선구자.​1. 자의식이 순수한 반성 능력이라면, 그것이 과잉으로 전환되는 임계점은 정확히 어디서 발생합니까?​▣ [김어준]: 우리가 흔히 입만 열면 이성, 이성 거리면서 고상한 척들을 오지게 하는데, 솔직히 까놓고 봅시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그 알량한 '자의식'이라는 게 정말 순수한 성찰의 도구입니까? 제가 보기엔 그건 순전히 공포의 산물이거든요. 내가 지금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내가 속한 이 좆같은 세상에서 도태되지는 않을까 하는 원초적인 쫄림이 임계점을 넘는 순간, 그 잘난 성찰이 자기합리화와 방어기제로 떡칠을 하게 되는 겁니다. 자의식이 과잉으로 치닫는 그 정확한 분기점, 그게 순수한 반성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대가리 굴리기로 변질되는 그 악취 나는 지점이 어디냐는 겁니다. 위선들 떨지 말고 본질을 똑바로 직시해 봅시다. 왜 인간은 스스로를 들여다보다가 미쳐버리는 겁니까?​▶ [오토 폰 비스마르크]: 당신의 그 거친 언사가 불쾌하긴 하나, 권력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소. 자의식이 과잉으로 전환되는 임계점은 철학자들의 온실 속이 아니라, 피비린내 나는 현실 정치와 생존의 역학 속에서 정확히 발생하오. 인간의 이성이란 애초에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무기일 뿐이오. '나'라는 주체가 타인이라는 거대한 위협과 마주했을 때, 그리고 나의 물리적, 사회적 영토가 침범당할 수 있다는 실존적 공포를 지각하는 바로 그 찰나에 자의식은 무기화되는 것이오. 순수한 반성? 국가 간의 조약에서 순수한 선의가 없듯, 인간 내면에도 순수한 반성이란 존재하지 않소. 과잉이란, 자신의 나약함을 은폐하기 위해 철갑을 두르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편집증적 징후요. 타자의 시선이 나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 이성은 스스로를 과잉 감시하며 폭주하기 시작하는 것이지.​▶ [요제프 괴벨스]: 비스마르크 재상의 말씀은 너무 고전적이군요. 나는 그 임계점을 대중 심리의 조작이라는 관점에서 아주 명확하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자의식이 '과잉'으로 넘어가는 순간은, 개인이 거울을 보며 고뇌할 때가 아니라, 그 거울 뒤에 군중이라는 거대한 집단의 시선이 투사되어 있음을 깨달을 때입니다. 순수한 반성 따위는 몽상가들의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이 속한 무리 안에서 도덕적 우위를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립니다. 우리는 그 강박, 즉 '내가 남들보다 더 올바르고 깨어 있어야 한다'는 그 얄팍한 자의식을 교묘하게 자극해주기만 하면 됩니다. 과잉은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주입된 기준에 자신을 억지로 끼워 맞추려다 뇌관이 터져버리는 현상입니다. 대중은 스스로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반성하는 '척'을 하며 타인을 검열할 명분을 찾을 뿐입니다. 그 위선의 임계점이 바로 선동가들에겐 가장 아름다운 예술의 시작점이죠.​▶ [홍대선]: 두 분의 말씀이 참으로 서늘합니다만, 저는 조금 더 인간적인, 냄새나는 역사 속으로 끌고 들어가 보고 싶습니다. 자의식 과잉의 임계점이요?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조선 시대 사문난적을 외치며 서로를 죽일 듯이 물어뜯던 노론과 소론의 논쟁을 보십시오. 그 시작은 퇴계나 율곡의 순수한 학문적 반성, 즉 어떻게 하면 인간의 이성(이와 기)을 완벽하게 통제할 것인가 하는 치열한 자의식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언제 괴물이 됩니까? 바로 그 순수한 반성이 '나의 권력과 밥그릇을 정당화하는 절대 반지'로 둔갑하는 순간입니다. 내가 쥔 이 알량한 진리가 행여나 틀렸을까 봐 두려워하는 그 내밀한 불안! 그 불안을 들키지 않으려고 목소리를 높이고 상대방을 이단으로 몰아붙이는 겁니다. 자의식 과잉은 결국 '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무의식적 공포가 임계점을 넘어 타인에 대한 폭력으로 터져 나오는, 아주 비극적이고 찌질한 인간의 방어기제인 셈이죠.​▶ [슬라보예 지젝]: 홍대선 작가님의 역사적 접근은 흥미롭지만, 라캉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본질을 약간 비껴간 면이 있습니다. 자의식이 과잉되는 임계점은 '대타자(The Big Other)'의 시선이 내면화되는 바로 그 파열의 순간입니다. 우리가 순수한 반성이라고 착각하는 것조차 이미 이데올로기적 환상입니다. 우리는 거울 속의 자신을 볼 때, 실제의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타자가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가상의 시선을 봅니다. 이 간극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불안(Angst)입니다. 자의식의 과잉은 이 간극을 메우려는, 불가능을 향한 필사적이고 우스꽝스러운 몸부림입니다. 내가 완벽한 주체임을 증명하려는 강박,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팔아치워야 하는 현대인들이 겪는 주이상스(Jouissance)의 폭발 지점인 것이죠. 그것은 반성의 결과가 아니라 반성이 실패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병리적 징후입니다.​▶ [김대중]: 지젝 교수의 깊은 철학적 사유에 경의를 표합니다만, 저는 이것을 정치와 민중의 삶이라는 실천적 영역에서 바라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의식이 과잉으로 흐르는 임계점은 역설적으로 '절망이 깊어질 때'찾아옵니다. 제가 오랜 세월 군사 독재와 맞서며 감옥과 사형수를 오가는 동안 뼈저리게 느낀 것은, 인간은 극도의 억압과 불확실성 속에서 스스로의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자의식을 날카롭게 벼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올바른 방향, 즉 민주주의와 인권을 향한 순수한 연대로 승화되면 역사의 진보가 되지만, 그 두려움이 타자에 대한 증오나 맹목적인 진영 논리로 갇혀버릴 때 자의식은 끔찍한 과잉의 괴물이 됩니다. 결국 임계점은 '나의 고통을 타인에 대한 포용으로 확장할 것인가, 아니면 타인에 대한 배제와 폭력으로 돌릴 것인가'하는 갈림길에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갈림길에서 끊임없이 이성의 끈을 다잡아야 합니다.​▣ [손석희]: 김대중 전 대통령님의 인내와 통찰에는 숙연해집니다만, 방금 그 말씀은 지나치게 낭만적이고 당위적인 해석 아닙니까? 대담의 본질을 직시해보시죠. 지금 논의하는 것은 이성의 구조적 결함이지, 훌륭한 정치인의 극복기가 아닙니다. 지젝 교수의 분석도 지나치게 추상적입니다. 저는 그 임계점을 대단히 현실적이고 차가운 지표로 정의하겠습니다. 자의식이 과잉으로 치닫는 순간은 '자기 객관화의 도구가 자기 기만의 도구로 역전되는 순간'입니다. 지식인들이 논문을 쓰고, 정치인들이 대의를 부르짖을 때, 그들은 스스로 성찰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세운 도덕적 우월성이라는 성채 안에 갇히는 겁니다. 타인의 비판이 들어오는 순간, 성찰은 멈추고 방어가 시작됩니다. 그 방어가 논리적 정합성을 잃고 감정적 히스테리로 변모하는 지점, 즉 '내가 무조건 옳다'는 무결성 콤플렉스가 발동하는 그 찰나가 바로 과잉의 임계점입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숭고함도 없습니다. 오직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이성의 타락만이 있을 뿐입니다.​▣ [김어준]: 씨바, 손석희 앵커, 말 한번 존나게 차갑게 하시네. 근데 정곡을 찔렀어요. 방어기제! 자기가 틀렸다는 걸 인정하기 싫어서 알량한 도덕적 우월성으로 갑옷을 입는 꼬라지. 김대중 대통령님 말씀은 훌륭하지만 그건 성인의 경지고, 현실의 군상들은 지젝이 말한 것처럼 남의 눈치나 보면서 불안해서 미쳐 돌아가는 거거든요. 근데 여기서 하나 더 짚고 넘어가야죠. 그 불안을 알면서도 뻔뻔하게 이용해 처먹는 새끼들이 있다는 겁니다. 자의식 과잉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인간들에게 '네가 옳아, 저 새끼들이 나쁜 놈이야'라고 도파민 주사를 놔주는 기득권과 플랫폼의 구조적 공범성! 이 병적인 순환 고리 속에서 순수한 이성이니 반성이니 떠드는 것 자체가 이미 코미디 아닙니까? 임마누엘 칸트 영감님, 당신이 그렇게 빨아대는 순수 이성이라는 거, 현실에서는 이렇게 개판으로 오작동하는데 여전히 이성 타령만 하실 겁니까?​▶ [임마누엘 칸트]: 김어준 사회자의 거친 언동 속에도 진리를 향한 모종의 열망이 있음은 간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상의 혼란스러움이 원리의 타당성을 파괴하지는 못합니다. 자의식이 과잉으로 전환된다는 당신들의 지적은 현상계에 속한 경험적 자아의 병리적 상태를 묘사한 것일 뿐, 선험적 통각(Transzendentale Apperzeption)으로서의 순수 자의식 자체의 결함은 아닙니다. 이성이 자기 자신을 반성하는 것은 이성이 지닌 최고의 권리이자 의무입니다. 과잉의 임계점은 이성이 자신의 한계, 즉 현상과 물자체의 경계를 망각하고 오성의 범주를 넘어선 독단론으로 빠질 때 발생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욕망이나 생존이라는 병리적(경험적) 동기를 도덕 법칙으로 착각할 때, 즉 이성이 자율성을 잃고 타율성에 종속될 때 그대들이 말하는 '히스테리적 과잉'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성의 오류는 이성 스스로의 치열한 비판을 통해서만 교정될 수 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프리드리히 니체]: 하하하! 늙은 쾨니히스베르크의 시계탑께서 또다시 그 지루하고 기만적인 거미줄을 짜고 계시는군! 순수 이성? 선험적 통각? 다 개소리요! 당신이 말하는 그 거창한 도덕 법칙과 순수한 반성이야말로 인류 역사상 가장 교활하게 발명된 자의식 과잉의 정점 아니오? 임계점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소. 왜냐하면 '이성'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삶의 끓어오르는 본능과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를 거세하기 위해 병든 자들이 만들어낸 환각제이기 때문이오! 스스로를 관찰하고 반성한다는 것은 생명력의 쇠퇴를 의미하오. 건강한 짐승은 자신을 반성하지 않소! 자의식의 과잉이란, 자신의 왜소함과 무능력을 견디지 못한 르상티망(Ressentiment, 원한)의 노예들이 자신을 억압하는 강자들을 도덕적으로 정죄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씌운 족쇄에 불과하오. 당신들이 말하는 그 임계점은 곧 생명력이 질식하여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하는 바로 그 부패의 시작점이란 말이오!​▶ [구스타프 르 봉]: 니체의 포효는 매혹적이나, 이 현상을 군중의 차원으로 끌어내리면 훨씬 더 기계적인 역학이 보입니다. 자의식의 과잉은 개인의 뇌실에서 시작될지 모르나, 그것이 폭발하는 임계점은 개인이 '군중'이라는 익명의 바다로 뛰어드는 순간 완성됩니다. 개인 상태에서는 아무리 자의식이 과잉되어도 일말의 합리적 통제와 책임감이라는 브레이크가 작동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무리를 지어 동질적인 감정에 전염되는 순간, 개인의 자의식은 무의식의 층위로 녹아내리고 맙니다. 남는 것은 '우리는 절대적으로 옳다'는 집단적 환각뿐입니다. 임계점은 개인의 반성이 군중의 최면 상태로 전환되어, 책임감은 증발하고 원초적인 파괴 본능만이 정당화되는 바로 그 심리적 융합의 순간입니다. 이 단계에서 이성은 이미 작동을 멈췄고, 오직 선동가의 암시에 반응하는 척수 반사만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 르 봉, 당신의 통찰은 탁월하오. 니체의 그 시끄러운 예술가적 분노보다 훨씬 현실 정치를 정확히 묘사하고 있소. 개인이 군중으로 용해되는 그 순간, 자의식은 과잉을 넘어 일종의 집단적 광기로 무기화되지. 정치가의 역할은 바로 이 지점에서 극대화되는 것이오. 나는 독일을 통일하기 위해 순수한 이성 따위에 기대지 않았소. 대중 내면에 잠재된 프랑스에 대한 공포와 게르만 민족주의라는 자의식 과잉의 임계점을 정확히 타격하여, 그것을 철과 피의 에너지로 치환시켰을 뿐이오. 임계점이란 결국 권력을 쥔 자가 대중의 불안을 목적의식적으로 폭발시키는 방아쇠에 불과하오. 그대들이 말하는 이성의 병리니, 도덕의 타락이니 하는 것들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데 필요한 윤활유일 뿐이란 말이오.​▶ [요제프 괴벨스]: 정확합니다, 비스마르크 재상! 결국 이 모든 철학적 헛소리들의 종착지는 '어떻게 그 임계점을 통제하고 조종할 것인가'로 귀결됩니다. 르 봉이 말한 그 군중의 최면 상태, 그게 바로 제가 라디오와 확성기를 통해 독일 민족 전체에 걸었던 마법 아닙니까. 개개인이 방구석에서 찌질하게 앓고 있는 그 자의식의 과잉, 그 불안감, 그 인정욕구를 광장으로 끌어내어 횃불과 제복으로 포장해 주면, 그들은 스스로를 역사적 사명을 띤 숭고한 주체로 착각하게 됩니다. 반성 능력이 과잉되어 히스테리를 부리는 자들에게 가장 강력한 처방전은, 반성할 필요가 없는 절대적인 '적'을 만들어 던져주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든, 볼셰비키든 상관없습니다. 임계점을 넘은 자의식은 언제나 자신을 불태울 화형대의 땔감을 갈구하기 마련이니까요.​▶ [홍대선]: 와, 진짜 소름 돋네. 이 두 양반들, 제국주의와 파시즘의 실무자들답게 사람의 약점을 아주 뼛속까지 발라먹을 줄 아는군요. 근데 이게 옛날 독일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러분. 지금 이 순간에도 똑같이 벌어지고 있는 짓거리들이에요. 옛날엔 괴벨스가 라디오 마이크 쥐고 떠들었다면, 지금은 그 마이크가 수천만 개의 스마트폰으로 분산됐을 뿐이죠. 유튜브, 트위터, 커뮤니티... 거기서 사람들이 뭘 합니까? 내 자의식이 이렇게 깨끗하고 도덕적이라는 걸 증명하려고 누군가를 미친 듯이 좌표 찍고 조리돌림하잖아요. 그게 바로 비스마르크나 괴벨스가 말한 '적을 던져주면 알아서 물어뜯는'그 히스테리의 현대판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존나게 똑똑하고 합리적이라고 믿지만, 사실은 거대한 알고리즘과 권력의 선동판 위에서 가장 원초적인 피 냄새를 좇아다니는 파블로프의 개로 전락해 버린 겁니다. 반성? 개나 주라고 하십시오. 지금은 맹신과 도파민만 남은 시대입니다.​▣ [김어준]: 씨바, 정리가 싹 되네! 홍 작가 말이 빙고지. 칸트 영감님이 말한 그 순결한 이성? 니체가 말한 짐승 같은 생명력? 지금 스마트폰 들고 눈에 핏대 세운 대중들한텐 다 사치스러운 개소리인 겁니다. 자의식 과잉의 임계점은 결국 '내가 좆밥이라는 걸 들키기 싫은 공포'가 '집단이라는 뒷배를 만나 도덕적 몽둥이를 쥐는 순간'폭발하는 거예요! 손석희 앵커가 말한 그 지독한 방어기제가, 비스마르크와 괴벨스 같은 권력자들의 설계와 만나서, 르 봉이 말한 좀비 떼로 진화하는 그 끔찍한 연쇄반응! 그 속에서 우리가 합리적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그 알량한 이성적 판단들이, 사실은 얼마나 알고리즘의 도파민 장사에 철저히 놀아나고 있는 본능적 배설물에 불과한지, 아주 명확해졌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 썩어빠진 이성이 자기 자신을 들여다본다는 행위 자체가 처음부터 불가능한 미션 아니었는지, 그 본질적인 모순 속으로 더 깊이 대가리를 처박아 봅시다.​2. 이성이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순간 이미 순수성을 잃는다는 헤겔식 명제에 동의하십니까, 아니면 그 반성 자체가 이성의 본령이라 보십니까?​▣ [김어준]: 이어서 바로 본질을 후벼파 봅시다. 헤겔이라는 양반이 아주 골 때리는 명제를 던졌어요. 이성이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순간, 이미 관찰하는 나와 관찰당하는 나로 분열되니까 그딴 순수성 따위는 개나 줘버렸다는 거 아닙니까? 제가 아까도 존나게 강조했지만, 인간이 자기 객관화 한답시고 거울 보는 순간 이미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하는 좆같은 뽀샵질이 들어간다고요. 자, 여러분. 이성이 스스로를 반성한다는 게 진짜로 진리에 다가가는 숭고한 과정입니까? 아니면 자기가 자기한테 속아 넘어가는 희대의 사기극, 그 정신적 자위행위에 불과한 겁니까? 폼 잡지 말고 밑바닥까지 까발려 봅시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 정치적 현실을 살아온 나로서는 헤겔의 관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소. 관찰하는 순간 순수성을 잃는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자연의 이치요. 외교 무대에서 한 국가가 자국의 도덕성을 스스로 성찰하겠다고 선언하는 순간, 그것은 백 퍼센트 타국을 기만하기 위한 고도의 위장 전술에 불과하오. 내면의 반성조차 마찬가지지. 이성이 자신을 관찰할 때, 그것은 결코 중립적인 법관의 태도가 아니오. 생존을 위해 어떤 명분을 만들어낼 것인가를 고민하는 교활한 변호사의 태도지. 이성의 본령이 반성이라고? 천만에. 이성의 유일한 본령은 주체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약점을 방어하는 생존의 도구일 뿐이오. 스스로를 관찰하여 오류를 찾는 척하는 것조차, 더 큰 실수를 방지하기 위한 이기적인 계산의 결과물일 뿐이란 말이오.​▶ [요제프 괴벨스]: 철혈 재상의 말씀이 이번에도 정확히 과녁을 꿰뚫었습니다. 이성이 스스로를 관찰한다는 것, 그것은 자기 기만의 가장 극명한 형태입니다. 선전의 세계에서 가장 다루기 쉬운 부류가 바로 자신은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끊임없이 반성한다고 믿는 지식인들입니다. 그들은 '나는 남들과 다르게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다'는 오만에 빠져 있죠. 우리는 그 오만을 이용하여 그들에게 아주 그럴싸한 통계와 논리적 외피를 씌운 거짓말을 던져줍니다. 그러면 그들은 자신의 이성을 총동원하여 우리가 주입한 거짓말을 '스스로 반성하여 얻은 진리'로 둔갑시킵니다. 관찰하는 자아와 관찰받는 자아가 분리된다는 헤겔의 통찰은 훌륭합니다. 그 분리된 틈새로 우리 같은 선동가들이 파고들어, 대중의 이성을 철저히 타락시키고 본능의 노예로 전락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홍대선]: 아, 이 두 분의 콤비 플레이는 언제 들어도 등골이 오싹합니다. 헤겔을 이렇게 악당들의 매뉴얼로 번역해내다니요! 하지만 저는 이야기꾼의 입장에서 이 비극적인 분열을 좀 다르게 봅니다. 이성이 자기를 관찰하면서 순수성을 잃는다는 건 맞아요. 그런데 그 잃어버리는 과정 자체가 존나게 눈물겨운 인간의 역사라는 겁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조선의 영조를 봅시다. 그는 평생을 '나는 무수리의 자식이고 형(경종)을 독살했다는 의심을 받는 불완전한 왕'이라는 끔찍한 자의식과 싸웠어요. 그래서 미친 듯이 학문에 매진하고 탕평책을 쓰며 자신의 이성을 반성하고 증명하려 했죠. 근데 그 결과가 뭡니까? 완벽에 대한 강박이 자기 자식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굶겨 죽이는 전대미문의 광기로 폭발했잖아요! 이성이 자기를 찌르고 찌르다 결국 피투성이가 되어 미쳐버린 겁니다. 반성이 이성의 본령이긴 한데, 그 본령이 인간을 구원하는 게 아니라 파멸로 몰고 가는 브레이크 고장 난 폭주 기관차라는 게 문제죠.​▶ [임마누엘 칸트]: 참으로 개탄스러운 논의의 연속입니다. 그대들은 이성의 '경험적 오용'을 이성의 '본질'로 환원하는 치명적인 범주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헤겔의 변증법적 분열을 빌려 이성의 순수성을 부정하려는 시도는 궤변에 불과합니다. 이성이 자기 자신을 관찰할 때 순수성을 잃는다는 것은, 그 관찰이 경험적이고 심리적인 층위에서 이루어질 때만 타당합니다. 홍 작가가 말한 영조의 예나, 비스마르크가 말하는 권력의 자기합리화는 모두 '경험적 자아'의 병리적 현상일 뿐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이성의 반성, 즉 '비판(Kritik)'은 선험적 차원에서 이성의 한계와 조건을 규명하는 작업입니다. 이 반성이야말로 이성을 독단론의 광기와 회의론의 무기력으로부터 구출하는 유일한 닻입니다. 반성 능력이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수학적 진리와 도덕적 정언 명령의 보편성을 확립할 수 있겠습니까? 이성은 자기 분열의 수렁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자기 비판을 통해 오히려 자율적 주권자로 우뚝 서는 것입니다.​▣ [손석희]: 칸트 선생의 그 견고한 관념론적 성곽 짓기는 학문적으로는 아름다울지 모르나, 현실 분석력은 제로에 가깝습니다. 정언 명령이요? 현실의 대중은 정언 명령이 아니라 '알고리즘의 명령'에 따라 움직입니다. 당신이 말하는 그 순수한 선험적 차원이라는 것은 인간의 뇌 구조나 사회적 역학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유니콘 같은 겁니다. 헤겔의 통찰이 위대한 이유는, 그가 인간 의식의 '역동적이고 타락하기 쉬운 본질'을 정확히 간파했기 때문입니다. 이성이 자기를 관찰하는 순간, 그것은 필연적으로 언어와 사회적 맥락이라는 불순물에 오염됩니다. 나는 저널리스트로서 매일같이 그 오염된 이성들의 촌극을 목격합니다. 정치인, 학자, 심지어 일반 시민들조차 카메라 앞이나 키보드 위에서 '나는 합리적이다'라고 선언하는 그 순간, 이미 특정 진영의 서사를 방어하기 위해 사실을 취사선택하는 극심한 자기 기만에 빠져듭니다. 반성이 이성의 본령이라는 주장은 인간에 대한 지독한 과대평가입니다.​▶ [슬라보예 지젝]: 손 앵커의 냉소주의는 날카롭지만, 정신분석학적으로 이 사태를 좀 더 비틀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헤겔이 말한 분열은 단순한 오염이나 자기 기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체가 형성되기 위한 필연적인 '절단'입니다. 이성이 스스로를 관찰할 때 잃어버리는 그 '순수성'이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한 적도 없는 환상입니다. 우리는 잃어버렸기 때문에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환상을 창조함으로써 주체성을 유지하는 겁니다! 이성이 반성한다는 행위 자체가 일종의 외상적(traumatic) 사건입니다.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순간, 우리는 우리가 결코 합리적이고 통합된 존재가 아니라, 모순과 충동으로 점철된 구멍 뚫린 존재라는 끔찍한 실재(the Real)와 직면하게 되니까요. 그래서 이성은 그 구멍을 메우기 위해 미친 듯이 이데올로기적 서사를 방어벽으로 세우는 겁니다. 반성은 이성의 본령이 맞습니다. 단, 그 반성은 진리를 찾기 위함이 아니라, 진리가 가져다줄 공포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눈가림'으로서의 본령인 셈이죠.​▶ [버락 오바마]: 지젝 교수의 흥미로운 정신분석학적 해부나 칸트 철학자의 근본적 원칙 모두 귀담아들을 가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문제를 민주주의와 제도의 렌즈를 통해 실용적으로 접근해보고 싶습니다. 이성이 스스로를 관찰할 때 순수성을 잃는다는 헤겔의 지적은 뼈아픈 진실입니다. 우리가 정치판에서 끊임없이 겪는 일이 아닙니까? 어떤 숭고한 정책이나 개혁도, 그것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주체들이 스스로를 도덕적으로 무결하다고 과신하는 순간 독단으로 변질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스마르크나 괴벨스처럼 반성 자체를 냉소하고 권력의 도구로만 치부해버린다면, 우리는 어떻게 파시즘의 광기와 극단주의를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 순수성을 잃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우리가 불완전하고 언제든 자기 기만에 빠질 수 있다는 그 쓰라린 '불완전성의 자각'이야말로 민주적 숙의의 출발점입니다. 완벽한 이성은 없지만, 분열되고 오염된 이성들이 모여 견제하고 타협하는 그 끈질긴 과정 속에 우리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합리성이 존재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김대중]: 오바마 대통령의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권력과 정치의 현장에서 이성의 순수성이라는 것은 모래성처럼 허물어지기 일쑤입니다. 저 역시 정치를 하며 내 안의 이성과 수없이 대화하고 관찰했지만, 때로는 현실의 장벽 앞에서, 때로는 지지자들의 맹목적인 기대 앞에서 제 이성이 얼마나 취약하게 흔들리고 타협하려 했는지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헤겔의 말대로 이성은 자기를 들여다볼 때 필연적으로 세속의 때를 묻힙니다. 그러나 묻은 때를 바라보며 절망하고 냉소하는 것이 아니라, 눈물을 머금고 그 때를 닦아내려는 처절한 시도, 그것이 바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이성의 진짜 본령입니다. 순수해서 위대한 것이 아니라, 더럽혀질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의 도마 위에 올리는 그 고통스러운 인내심이 역사를 조금씩 앞으로 밀고 나가는 힘인 것입니다.​▣ [김어준]: 아, 젠장! 오바마 형님하고 김대중 대통령님, 두 분이 아주 훈훈하게 휴머니즘으로 포장을 해주시는데, 저는 씨바 그 낭만주의에 확 찬물을 좀 끼얹어야겠습니다. 고통스러운 인내심? 불완전성의 자각? 지금 인터넷 커뮤니티나 소셜 미디어 돌아가는 꼬라지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옵니까? 지금 대중들이 자기를 성찰의 도마 위에 올려요? 지랄! 남들만 죽어라 도마 위에 올리고 자기들은 관중석에서 돌만 쳐 던지고 있잖아요! 이성이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순간, 방금 지젝이 말한 것처럼 자기 내면의 그 끔찍한 모순과 찌질함을 보게 되니까, 거기서 도망치려고 환장병이 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냐? 내 안의 쓰레기를 밖으로 투사하는 거죠! 내가 좆같은 게 아니라 저 새끼들이 좆같은 거라고! 이게 바로 반성이 타락해서 '히스테리'로 넘어가는 길목입니다. 손석희 앵커가 지적한 대로, '나는 합리적이다'라는 자위행위가 결국 타인을 린치하는 폭력의 명분으로 둔갑하는 이 미쳐버린 구조! 여기서 이성의 본령이니 뭐니 한가한 소리 할 때가 아니란 말입니다.​▶ [프리드리히 니체]: 하하하! 바로 그거요, 김어준! 그대가 드디어 망치를 들고 병든 위선자들의 대가리를 깨부수기 시작했군! 오바마나 김대중의 저 역겨운 목사 같은 설교를 들어보시오. '더럽혀질 것을 알면서도 성찰한다'고? 그것이야말로 전형적인 노예 도덕의 자기 기만이오! 이성이 스스로를 관찰할 때 발생하는 것은 반성이 아니라 '원한(Ressentiment)'의 축적이오. 자기를 직시할 용기도, 힘도 없는 약자들이 모여 앉아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며, 자신들보다 강하고 아름다운 자들을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깎아내리기 위해 발명한 것이 바로 그 '성찰'이라는 독약이지. 헤겔이 말한 분열은 이성이 자기를 관찰해서가 아니라, 본래부터 펄떡이던 생명력을 이성이라는 이질적인 칼로 난도질했기 때문에 생긴 치명상이오! 반성이라는 환상을 버려야만 비로소 초인(Übermensch)을 향한 거대한 긍정이 시작될 수 있소.​▶ [요제프 괴벨스]: 니체의 철학적 쾌감에는 찬사를 보냅니다만, 현실의 실무자로서 나는 그 '원한'을 어떻게 요리할지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사회자의 말이 정확합니다. 대중은 절대로 자기 자신을 도마 위에 올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관중석에 앉아 우리가 던져주는 제물에 돌을 던지며 쾌감을 느낍니다. 이성의 자기 관찰이 순수성을 잃는다는 명제? 나는 그것을 대중 조작의 제1원칙으로 삼습니다. 사람들에게 '당신들은 스스로 성찰하는 깨어있는 시민이다'라고 끊임없이 속삭여 주십시오. 그러면 그들은 자신들의 이성이 완벽하다는 환상에 취해, 우리가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가장 비이성적인 분노를 쏟아낼 것입니다. 반성이란 이성의 본령이 아니라, 이성을 가장 철저하게 마비시키는 최고급 마취제입니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 괴벨스, 자네의 그 천박한 포퓰리즘적 시각은 늘 입맛이 씁쓸하지만, 작동 원리만큼은 부정할 길이 없군. 국가를 운영하는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요. 대중이 스스로 반성하고 숙의하는 민주주의? 오바마, 그런 건 교과서에나 존재하는 허구의 시스템이오. 대중의 이성이 스스로를 향할 때 발생하는 것은 끝없는 분열과 소모적인 논쟁뿐이오. 헤겔의 명제대로 이성은 끝없이 자신을 쪼개고 의심하게 만들지. 그래서 강력한 국가는 대중의 자의식이 내부로 향하지 못하도록 외부의 적이나 위대한 국가적 목표를 제시하여 그 시선을 밖으로 돌려버리는 거요. 반성이 이성의 본령이라고? 만약 그렇다면 국가라는 거대한 기계를 굴리기 위해 그 본령을 철저히 거세하고 짓밟아야만 비로소 질서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이오.​▶ [홍대선]: 비스마르크와 괴벨스의 저 소름 돋는 국가주의적 오만에 진저리가 납니다만, 슬프게도 역사는 저들의 말이 맞다고 증명해 왔습니다. 헤겔의 명제처럼, 이성이 스스로를 들여다보다 길을 잃은 대표적인 집단이 바로 근대 이후의 엘리트 지식인들입니다. 이들은 자기 관찰의 늪에 빠져 끝없는 이데올로기적 순수성 논쟁을 벌였죠. 러시아 혁명 이후의 볼셰비키들, 68혁명 이후의 서구 좌파들, 그리고 한국의 수많은 진보와 보수 진영들... 그들은 '우리의 이성적 반성이 가장 순수하다'고 주장하며 끊임없이 자기 분열을 거듭했습니다. 그리고 그 분열의 빈틈을 파고든 것이 바로 스탈린주의나 파시즘, 혹은 자본주의의 욕망 기계였죠. 반성이 이성의 본령이라는 말은 멋지지만, 그 본령에만 집착하다가 현실의 괴물들에게 다 털려버리는 게 우리네 역사적 코미디 아닙니까. 이성은 자기를 반성하다가 결국 자의식 과잉이라는 히스테리적 괴물을 낳고, 그 괴물은 본능과 광기라는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리게 되는 겁니다.​▣ [김어준]: 씨바, 아주 밑바닥까지 다 긁어모았습니다. 칸트 영감님의 고군분투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이성의 자기 관찰이라는 건 결국 지젝이 말한 구멍 난 실재를 가리려는 이데올로기적 방어막이자, 괴벨스가 써먹기 딱 좋은 마취제라는 결론이 나오네요. 반성이 이성의 본령이라는 낭만적인 개소리는 이 살벌한 전쟁터에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존나게 성찰하고 합리적이다'라는 그 착각 자체가 집단화의 땔감이 되어서 히스테리의 불구덩이로 쳐박히는 가속 페달이라는 거죠. 자, 이성이 얼마나 찌질하게 붕괴하는지 확인했으니, 이 자의식 과잉이 도대체 개인의 뇌피셜인지 아니면 이 좆같은 근대 시스템이 애초부터 불량품으로 만들어낸 구조적 결함인지 다음 뼈때리는 논제로 넘어가 봅시다.​3. 자의식 과잉은 개인 차원의 병리입니까, 아니면 근대적 주체 구성 자체에 내장된 구조적 결함입니까?​▣ [김어준]: 이어서 바로 치고 나갑니다. 지금 밖에서 핸드폰 붙잡고 누군가를 조리돌림하면서 '내가 정의다'라고 거품 무는 저 인간들, 저거 그냥 개인들이 성격 파탄 나서 저러는 겁니까? 아니면 우리가 신줏단지 모시듯 떠받드는 '근대적 주체'라는 거, 즉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이 잘난 데카르트식 세팅 자체가 애초부터 좆망한 불량 소프트웨어였던 겁니까? 저는 후자에 몰빵합니다. 개인이 미친 게 아니라, 끊임없이 스스로를 증명하라고 압박하는 이 미친 시스템이 인간의 대가리에 과부하를 걸어서 단체로 히스테리를 일으키게 조작해놨다는 거죠. 자의식 과잉, 이거 개인의 멘탈 문제입니까, 근대 문명의 뼛속 깊은 구조적 하자입니까?​▶ [오토 폰 비스마르크]: 개인의 병리? 그런 하찮은 미시적 관점은 정치인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소. 자의식 과잉은 100퍼센트 근대 국가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거대한 구조적 결함이요. 아니, 결함이라기보다는 국가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식된 '통제 장치'라고 봐야 정확하겠지. 중세 시대에 개인의 자의식 따위가 어디 있었소? 그들은 그저 신의 피조물이자 영주의 부속품이었지. 그러나 근대가 도래하고 '주체'라는 환상을 개인에게 심어준 순간부터 모든 비극이 시작된 거요. 국가는 징병과 징세를 위해 신민들을 '독립적 주체'로 호명해야 했소. 너는 자유롭고 이성적인 개인이다. 그러니 국가에 책임과 의무를 다하라고 세뇌한 거지. 그 결과, 근대인은 쥐뿔도 없는 주제에 끊임없이 자신이 가치 있는 주체임을 증명해야 하는 강박, 즉 거대한 자의식 과잉의 굴레에 갇히게 된 거요. 이것은 병리가 아니라 철저하게 설계된 정치적 구조요.​▶ [요제프 괴벨스]: 재상의 말씀에 전율을 느낍니다. 정확합니다. 근대적 주체라는 것은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사기극입니다. 우리는 대중에게 '당신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이성적 개인'이라는 달콤한 독약을 먹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신과 왕이라는 절대적 권위가 무너진 자리에, 대중 각자가 스스로를 감시하고 채찍질하는 내면의 독재자, 즉 '과잉된 자의식'을 심어놓기 위해서입니다. 개인이 자유롭다고 착각할수록, 그들은 자신이 선택한 이데올로기나 집단에 더욱 맹목적으로 복종하게 됩니다. 자의식 과잉은 개별적인 정신병이 아니라, 우리가 대중을 통제하고 동원하기 위해 선전선동의 인프라로 깔아놓은 근대성의 근본 운영체제(OS)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고뇌하고 분노한다고 믿지만, 사실은 우리가 설계한 매트릭스 안에서 구조적 히스테리를 일으키며 춤추는 꼭두각시일 뿐입니다.​▶ [홍대선]: 와, 이 파시스트 듀오의 통찰은 진짜 악마적으로 정확해서 반박할 수가 없네. 저 역시 철저하게 구조적 결함이라고 봅니다.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죠. 서구에서 근대적 주체가 탄생할 때 가장 큰 역할을 한 게 뭔지 아십니까? 바로 자본주의의 '신용(Credit)'시스템과 '계약'입니다. 이제 나는 누구 가문의 셋째 아들이 아니라, 시장에서 내 노동력과 신용을 증명해야 하는 고립된 단독자가 된 겁니다. '내가 얼마나 쓸모 있는 인간인가', '내가 얼마나 계약을 잘 지키는 합리적 존재인가'를 끊임없이 타인에게 어필해야만 굶어 죽지 않는 세상이 열린 거예요. 그 끔찍한 생존의 압박이 어떻게 개인의 멘탈 문제입니까?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는 우아한 철학이 아니라, '씨바, 내가 생각하고 증명하지 않으면 내일 당장 길거리에 나앉는다'는 공포의 비명이 근대성의 본질입니다. 이 압도적인 구조적 불안감이 현대에 와서는 소셜미디어의 '좋아요'와 알고리즘으로 진화해서 인간의 자의식을 미친 듯이 과부하 시키고 있는 거죠.​▶ [버락 오바마]: 세 분의 우울하고 구조결정론적인 진단에 절반은 동의하지만, 절반은 강력히 반대합니다. 자의식 과잉이 근대적 주체 형성에 내재된 구조적 긴장감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은 맞습니다. 산업화와 민주화는 개인에게 엄청난 자유를 주었지만, 동시에 '스스로의 운명을 책임져야 한다'는 무거운 짐을 지웠죠. 에리히 프롬이 말한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일어나는 심리적 기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단순히 비스마르크나 괴벨스의 통제 도구로 환원하거나, 홍 작가처럼 공포의 산물로만 비하하는 것은 민주주의 역사의 위대한 성취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근대적 주체의 자의식은 결함이 아니라 진보를 위한 '동력'이었습니다. 스스로의 권리를 자각한 주체들이 연대하여 노예제를 폐지하고 인권을 확장해왔습니다. 오늘날 소셜미디어 환경에서 그 자의식이 병리적으로 과잉되어 부작용을 낳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제도의 개선과 시민 교육으로 조정 가능한 일시적 열병이지, 근대성 자체를 폐기해야 할 불량 소프트웨어는 아닙니다.​▶ [김대중]: 오바마 대통령의 균형 잡힌 시각에 위안을 얻습니다. 저 역시 이 구조적 결함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근대적 주체가 구조적으로 고독과 불안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실존의 조건입니다. 제가 '대중문화와 민주주의'에 대해 고민할 때도 가장 큰 숙제는 어떻게 이 파편화된 개인들의 불안한 자의식을 건강한 공동체 의식으로 승화시킬 것인가였습니다. 자의식 과잉이 지금 병리적인 히스테리로 나타나는 이유는, 근대 시스템 자체가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양극화와 승자독식 구조가 개인을 극단적인 생존 경쟁으로 내몰았기 때문입니다. 주체로서 긍지보다는 낙오에 대한 공포가 커질 때 자의식은 맹독성을 띱니다. 따라서 이것은 철학적 실패가 아니라 정치와 경제의 실패입니다. 불평등을 완화하고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하여 개인의 자의식이 과잉 방어기제로 작동하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것이 정치의 책무 아니겠습니까.​▣ [손석희]: 두 분 정치인들의 훌륭한 '선거 유세용'모범 답안은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대담의 밀도를 떨어뜨리는 안일한 양비론이군요. 일시적 열병이요? 정치와 경제의 실패요? 천만에요. 이것은 근대적 주체 자체에 새겨진 치명적이고 유전적인 '암(Cancer)'입니다. 슬라보예 지젝의 이데올로기 분석을 빌려오지 않더라도 현상은 명확합니다. 근대 이성은 인간을 신으로부터 해방시켰다고 자부했지만, 실상은 '이성'이라는 새롭고 훨씬 더 억압적인 신전 안에 인간을 가두었습니다.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강박, 주체적이어야 한다는 강박이 현대인을 질식시키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 사회처럼 압축 근대화를 겪은 곳에서는 그 구조적 결함이 극단적인 '인정 투쟁'으로 발현됩니다. 타인의 시선 속에서 나의 주체성을 확인받지 못하면 죽은 것과 다름없다는 이 지독한 나르시시즘의 변종! 이것은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한다고 고쳐지는 게 아닙니다. 인간이 스스로를 세계의 중심에 놓은 근대 휴머니즘의 오만이 빚어낸 필연적인 재앙, 완벽한 구조적 붕괴의 전조 증상입니다.​▶ [프리드리히 니체]: 하하하! 손석희 당신의 눈빛이 마음에 드는군! 마침내 이 썩어가는 병실에서 제대로 된 진단서가 한 장 나왔소! 오바마와 김대중, 당신들이 말하는 그 알량한 민주주의와 인권, 평등이라는 단어들은 근대의 병리학을 숨기기 위한 가장 역겨운 마취제에 불과하오! 자의식 과잉이 일시적 열병이라고? 천만에! 그것은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헛소리를 지껄인 그 저주받은 순간부터 인간의 뇌수에 박힌 구조적 쇠말뚝이오! 대지를 딛고 춤추는 육체와 본능을 부정하고, 창백한 대가리 속의 '주체'라는 유령을 발명한 결과가 무엇이오? 지금 저 길거리를 보시오. 생명력은 텅 비어있고, 오직 자신이 남보다 더 도덕적이고 깨어있음을 증명하려 발악하는 최후의 인간(Der letzte Mensch)들만이 벼룩처럼 뛰어다니고 있지 않소! 이 자의식의 과잉은 근대라는 시대가 스스로의 목을 조르는 가장 완벽한 자살 메커니즘이오! 구조적 결함? 아니, 근대성 그 자체가 곧 거대한 정신병동이오!​▶ [슬라보예 지젝]: 니체의 광기 어린 예언에 정신분석학적 뼈대를 좀 세워드리겠습니다. 손 앵커와 니체의 지적대로, 이것은 명백한 구조적 결함입니다. 근대적 주체는 태생적으로 '분열'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와 근대 이데올로기는 주체에게 너는 완전히 자유로운 개인이다! 네 욕망을 실현하라!고 끊임없이 명령합니다. 이것이 바로 초자아(Superego)의 잔혹한 명령입니다. 과거의 초자아는 이것을 하지 마라고 금지했지만, 현대의 초자아는 즐겨라! 성공해라! 완벽한 주체가 되어라!라고 긍정을 강요합니다. 개인이 이 불가능한 명령을 수행할 수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바로 극단적인 불안과 자의식의 과잉입니다. 즉, 내가 충분히 자유롭지 않고, 충분히 성공하지 못했다는 끔찍한 죄책감! 이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현대인들은 역설적으로 파시즘적인 집단에 헌신하거나, 소셜미디어에서 타인을 린치하며 얄팍한 카타르시스를 얻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의 실패가 아니라, 주체를 과잉 호명하여 쥐어짜는 자본주의적-근대적 구조의 완벽한 작동 방식 그 자체입니다.​▣ [김어준]: 씨바! 지젝 교수, 오늘 폼 미쳤네. 방금 그 말, 소름 쫙 돋았습니다. 즐겨라, 성공해라, 완벽해라!"이게 바로 자본주의와 근대 시스템이 우리 대가리에 꽂아 넣은 좆같은 가스라이팅이라는 거 아닙니까! 오바마 형님, 정치로 해결된다고요? 개소리 마십쇼. 정치가 이 시스템을 돌리는 숙주인데 뭘 해결합니까! 개인들은 이 불가능한 미션에 치여서 대가리가 터지기 일보 직전인데, 거기다 대고 '너희들은 합리적인 민주 시민이니까 성찰하고 연대해라'라고 하니까 미치고 팔짝 뛰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차라리 괴벨스나 비스마르크처럼 대놓고 선동하는 새끼들한테 홀딱 넘어가서, 생각하는 거 포기하고 집단이라는 거대한 익명성에 숨어버리는 거 아니냐고요! 이게 바로 근대적 주체라는 껍데기가 얼마나 개스캠인지 증명하는 완벽한 꼬라지입니다. 병리는 개뿔, 애초에 지을 때부터 철근 빼먹고 지은 순살 아파트 같은 구조적 붕괴, 그게 바로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자의식 과잉의 진면목입니다. 싹 다 정리됐습니다. 다음으로 넘어가죠. 이 불안한 이성이 이제 어떻게 집단화의 늪으로 빠져들어가는지 까발려보겠습니다.​4. 이성이 자신의 정당성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상태 — 이것 자체가 이미 불안의 산물 아닙니까?​▣ [김어준]: 자, 이전 논의에서 근대적 주체가 얼마나 불안한 순살 아파트인지 적나라하게 털어봤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필연적으로 튀어나오는 좆같은 상황 하나 더 짚고 넘어가죠. 대중들이, 지식인들이, 정치인들이 툭하면 '내 논리가 맞다', '내가 역사적으로 정당하다', '내가 더 도덕적이다'라고 거품 물고 발악하는 꼬라지들. 이성이 자기 정당성을 남들한테 끊임없이 컨펌받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이 병적인 상태! 이거, 이성이 작동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자기 존재가 부정당할까 봐 오줌 지리기 직전의 '불안감'이 만들어낸 발작 아닙니까? 이성이라는 고급 포장지를 벗겨내면, 그 안에 웅크리고 있는 건 그저 덜덜 떠는 원초적 공포 아니냐는 겁니다. 권력자들, 그리고 사상가 양반들! 당신들이 포장한 그 이성의 정당성이란 거, 까놓고 보면 그냥 살려달라는 비명소리 아닙니까?​▶ [오토 폰 비스마르크]: 그대의 질문은 날이 서 있지만, 정치를 움직이는 가장 근원적인 동력을 정확히 타격하고 있소. 이성이 정당성을 증명하려 발버둥 치는 것? 당연히 그것은 뼛속 깊은 공포와 불안의 산물이오. 내가 프로이센의 수상으로서 수많은 정책과 전쟁의 '정당성'을 의회와 국민 앞에서 역설할 때, 그것이 순수한 이성적 도출이었다고 생각하시오? 천만에. 그것은 내 권력이 실각할지 모른다는 불안, 프로이센이 유럽의 역학 구도에서 잡아먹힐지 모른다는 제국주의적 공포가 만들어낸 화려한 방패였소. 약소국일수록 국제법의 정당성을 부르짖고, 권력이 취약한 군주일수록 신성한 혈통과 도덕을 강조하는 법이오. 진정으로 강한 자, 불안하지 않은 자는 정당성 따위를 증명하려 혀를 놀리지 않소. 그냥 힘으로 밀어붙일 뿐이지. 오늘날 대중이 소셜미디어에서 자신의 도덕적 정당성을 증명하려 피대를 세우는 현상 역시, 그들이 현대 사회의 역학 구도 속에서 얼마나 무력하고 불안한 존재인지를 자백하는 꼴에 불과하오.​▶ [요제프 괴벨스]: 재상의 냉혹한 자기 고백에 이어, 나 역시 선전가의 입장에서 이 진리를 확인시켜 드리지요. 대중이 이성적 정당성을 갈구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축복입니다. 왜냐? 그 정당성이라는 것이 바로 그들의 불안을 잠재워줄 '젖꼭지'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유 없이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죽일 만큼 대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항상 '내가 저 유대인을, 저 볼셰비키를 혐오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합리적이고 도덕적으로 정당하다'는 알리바이를 원하죠. 그 알리바이가 없으면 그들의 빈약한 자아는 죄책감과 불안감에 짓눌려 붕괴해 버리니까요.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가장 완벽한 논리와 통계, 숭고한 민족주의적 정당성을 '이성의 언어'로 위장하여 제공했습니다. 이성의 정당성 증명은 진리를 향한 여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불안이라는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대중이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거미줄이며, 우리는 그 거미줄을 흔들며 그들을 통제하는 것입니다.​▶ [홍대선]: 역사의 악마들이 이렇게 솔직하게 털어놓으니 저 같은 이야기꾼은 소름이 끼치면서도 할 말이 풍성해집니다. 이성이 정당성을 증명하려는 행위가 불안의 산물이라는 건 우리 역사 속에 널리고 널린 비극입니다. 가까운 조선의 예송논쟁을 또 가져와 볼까요?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효종의 정통성 콤플렉스! '나는 적장자가 아니다'라는 그 끔찍한 실존적 불안감이, 죽을 때 상복을 1년을 입네, 3년을 입네 하는 성리학적 이성의 극한 논쟁으로 폭발한 겁니다. 서인과 남인이 그토록 치열하게 경전의 문구를 들이밀며 정당성을 증명하려 했던 진짜 이유는, 예법에 대한 학문적 열정이 아니라 상대에게 권력을 뺏기면 멸문지화를 당한다는 '생존의 공포'때문이었어요. 현대 한국 사회의 진영 논리도 똑같습니다. 양쪽 다 수백 쪽짜리 판결문과 경제 지표를 들이대며 이성적인 척하지만, 그 심연에는 '저 새끼들이 정권을 잡으면 우리가 다 죽는다'는 원초적인 불안과 공포가 똬리를 틀고 있는 거죠. 정당성 증명은 결국 덜덜 떠는 약자들의 무기일 뿐입니다.​▶ [임마누엘 칸트]: 참으로 통탄할 노릇입니다. 현상계의 더러운 진흙탕 속에서 뒹구는 사례들만을 모아 이성의 본질을 훼손하려 들다니요. 그대들이 말하는 것은 이성이 '경험적 목적(생존, 권력)'에 봉사하는 도구로 전락했을 때 나타나는 병리적 타율성일 뿐입니다. 이성이 자신의 정당성을 증명하려는 욕구 자체가 불안의 산물이라 단정하는 것은 극단적인 환원주의입니다. 순수 이성이 정당성(법칙)을 수립하려는 것은 불안 때문이 아니라, 보편적 진리와 도덕적 질서를 향한 '자유의 발현'입니다. 인간이 본능의 노예로 머물지 않고 도덕 법칙을 세우려 고뇌하는 것을 어찌 공포의 산물로 매도합니까? 설령 현실의 인간들이 공포와 불안 속에서 이성을 변명거리로 오용한다 할지라도, 이성이 이성 스스로의 정당성을 심문하는 철학적 비판 작업 자체의 숭고함까지 진흙창으로 끌어내려서는 안 됩니다.​▣ [손석희]: 칸트 선생, 당신의 그 '순수 이성'이라는 방어벽이야말로 지금 당신이 가장 불안해하고 있다는 완벽한 증거로 보입니다만. 철학의 상아탑이 무너질까 봐 두려워서 경험적 현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기자가 현장에서 목격하는 인간은 칸트의 책 속에 있지 않습니다. 홍 작가와 괴벨스의 지적이 100% 팩트입니다. 저는 뉴스 데스크에 앉아 수많은 지식인과 권력자들이 자신의 정당성을 논리정연하게 증명하는 꼴을 지켜봤습니다. 그들의 말이 화려하고 논리적일수록, 팩트의 나열이 촘촘할수록, 저는 그 이면에서 거대한 불안의 그림자를 읽습니다. 논리가 길어진다는 것은 그만큼 방어해야 할 맹점이 많다는 뜻이고, 정당성을 강박적으로 외친다는 것은 이미 내면에 그 정당성에 대한 회의가 시작되었다는 반증입니다. 가장 확실한 진실은 증명할 필요조차 없는 법이니까요. 이성은 불안을 감추기 위한 가장 정교한 메이크업입니다.​▶ [슬라보예 지젝]: 아, 손석희 앵커가 칸트의 뼈를 아주 제대로 때렸습니다. 정신분석학적으로도 정당성에 대한 강박은 명백한 불안(Angst)의 증상입니다. 라캉의 개념을 빌리자면, 주체는 타자(대타자)의 시선 속에서만 자신의 존재를 승인받을 수 있습니다. 나는 정당하다고 외치는 것은 타자를 향해 제발 나를 인정해 줘! 내 존재가 틀리지 않았다고 말해 줘!라고 애원하는 꼴입니다. 이것이 바로 히스테리적 주체의 전형적인 구조입니다! 이성은 그 애원에 논리적 형태를 부여하는 언어적 장치일 뿐이죠. 우리가 온라인에서 키보드 배틀을 벌이며 미친 듯이 링크를 달고 논리를 펼치는 이유가 진리를 찾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내 존재가 의미 없다는, 내 믿음이 허상일지 모른다는 그 공백의 공포를 언어의 소음으로 덮어버리기 위한 필사적인 바리케이드입니다. 증명이 끝없이 반복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어떤 이성적 증명도 우리의 근원적 불안을 채워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버락 오바마]: 여러분들의 지적처럼, 정당성 증명의 이면에 불안과 공포가 도사리고 있다는 통찰은 매우 현실적이고 날카롭습니다. 정치를 하면서 저 역시 수많은 정책을 설명할 때 대중의 불안을 달래고 반대파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수사학적 노력을 기울였으니까요. 그러나 그것을 단지 '덜덜 떠는 약자의 비명'이나 '자위행위'로만 폄하하는 데는 단호히 반대합니다. 불안하기 때문에 정당성을 증명하려 한다는 것이 왜 조롱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까? 불안과 공포는 인간 생존의 기본 감정입니다. 문명은 바로 그 맹목적인 공포와 주먹다짐을, 이성이라는 포장지를 씌운 '말과 논리의 전쟁'으로 치환시킨 위대한 진보의 결과물입니다. 공포를 무력으로 표출하지 않고, 정당성을 논증하려는 그 찌질하고 치열한 과정 자체가 바로 민주주의의 숙의 과정입니다. 이성의 껍데기를 쓰고라도 서로를 설득하려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비스마르크가 말한 피와 철의 야만으로 직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김대중]: 오바마 대통령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민주화 투쟁 시절, 저를 옭아매려는 독재 정권의 총칼 앞에서 제가 든 무기는 오직 '이성적 정당성의 증명'뿐이었습니다. 사형 선고를 받고도 법정에서 민주주의와 역사의 정당성을 조목조목 논증하던 저의 심연에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이 없었겠습니까? 뼛속까지 시리도록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그 불안을 폭력이나 굴종으로 회피하지 않고, 끊임없이 나의 정당성을 이성의 언어로 길어 올리는 과정, 그 고통스러운 증명의 과정이 곧 불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이었습니다. 정당성을 증명하려는 시도가 불안의 산물임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 불안을 통과하여 벼려진 이성은 더 이상 비겁한 방어기제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가장 고결한 칼날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불안의 그늘만 볼 것이 아니라, 그 그늘 속에서 싹을 틔우려는 이성의 빛을 보아야 합니다.​▣ [김어준]: 씨바! 오바마 형님에 이어 김대중 대통령님까지 이렇게 숭고한 서사를 들이미시면 제가 존나 나쁜 놈이 되는 기분이긴 한데! 그래도 팩트는 팩트 아닙니까! 김대중 대통령님 같은 거인들은 그 불안을 역사적 저항으로 승화시켰다 칩시다. 근데 문제는 지금 이 스마트폰 들고 미쳐 날뛰는 99%의 대중들이라는 겁니다! 이 새끼들은 숭고한 저항을 하는 게 아니라, 지젝이 말한 것처럼 자기 존재가 좆밥이라는 걸 들키기 싫어서 방구석에서 만만한 타겟 하나 잡고 '내가 더 정당해!'라며 이성의 탈을 쓴 히스테리적 린치를 가하고 있단 말입니다! 손 앵커 말마따나 그 촘촘한 논리 뒤에는 '나 좀 인정해 줘'라는 찌질한 애원이 숨어있는 거고, 괴벨스 같은 권력자들은 그걸 보며 낄낄대며 도파민을 팔아먹는 이 개같은 구조! 여기서 이성의 빛이니 뭐니 하는 건 결국 1% 엘리트들의 지적 유희일 뿐입니다. 증명에 집착하는 순간, 이성은 이미 본능적 불안의 노예로 전락했다는 이 잔혹한 진실, 이거 부정할 수 있는 사람 있습니까? 다음 챕터로 갑시다. 이 과부하 걸린 대가리들이 어떻게 뭉쳐서 괴물이 되는지 데카르트부터 탈탈 털어보겠습니다.​5. 데카르트적 코기토와 오늘날의 과잉 자의식은 연속선상에 있습니까, 단절입니까?▣ [김어준]: 자, 철학 좀 한다는 양반들이 맨날 우려먹는 그 유명한 주문 있잖아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르네 데카르트라는 양반이 모든 걸 의심하다가 결국 '의심하고 있는 내 대가리'는 진짜다, 라며 근대 주체의 깃발을 꽂은 그 순간 말입니다. 근데 질문 들어갑니다. 그 깔끔하고 이성적이었던 데카르트의 '코기토'가, 지금 스마트폰 붙잡고 내 정체성이 어쩌고, 내 상처가 어쩌고 하며 피해망상에 빠져 미쳐 돌아가는 이 현대인들의 '과잉 자의식'과 촌수가 닿는 겁니까? 데카르트가 낳은 사생아가 지금의 저 찌질한 관종들입니까, 아니면 데카르트는 억울하게 이름만 팔린 거고 아예 족보가 다른 돌연변이가 탄생한 겁니까? 철학의 원죄를 물어봅시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 이것은 완벽한 연속선상에 있소.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근대라는 괴물의 심장을 이식한 첫 번째 수술이었지. 중세 시대까지 인간은 세계라는 거대한 질서, 신의 섭리라는 기계의 작은 톱니바퀴에 불과했소. 그런데 데카르트가 세계의 중심을 '나의 생각'으로 돌려버린 거요. 인간 오만의 시작이지. 주체가 모든 판단의 최종 심급이 되는 순간, 세계는 '나'에 의해 증명되고 평가받아야 할 대상(객체)으로 전락했소. 정치적으로 이것은 엄청난 파장을 낳았소. 개개인이 자신을 세계의 중심이라 믿게 되면서, 국가는 이 거대해진 자아들을 통제하기 위해 훨씬 더 교활한 이데올로기와 무력을 동원해야 했지. 오늘날의 과잉 자의식은 데카르트가 던진 그 '나'라는 눈덩이가 자본주의와 기술이라는 비탈길을 구르며 통제 불능의 눈사태로 커진 필연적 결과요. 돌연변이가 아니라, 가장 완벽하고 참혹한 적자(嫡子)란 말이오.​▶ [요제프 괴벨스]: 재상의 통찰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코기토와 오늘의 관종들은 정확히 같은 혈통입니다. 데카르트는 인간에게 '자신을 스스로 의심하고 관찰하는 권력'을 주었죠. 그러나 그 권력은 보통의 인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무거운 왕관이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은 곧 생각(증명)하지 못하면 존재가 지워진다는 끔찍한 공포를 배태하고 있습니다. 신이라는 든든한 백그라운드가 사라진 텅 빈 우주에서, 오직 자기 자신의 생각만으로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현대인들의 그 극단적인 고독과 불안감! 우리는 선전국에서 이 코기토의 딜레마를 완벽하게 이용했습니다. 불안에 떠는 데카르트의 후예들에게, 민족주의와 총통이라는 거대한 우상을 던져주며 네가 스스로 생각할 필요 없다. 우리가 대신 생각해주마. 너는 그저 복종함으로써 너의 숭고한 존재를 확인하라고 속삭인 것이죠. 오늘날의 소셜 미디어 플랫폼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알고리즘이 대신 생각해주고, 대중은 좋아요 버튼 하나로 자신의 얄팍한 코기토를 증명하며 자위하고 있을 뿐입니다.​▶ [프리드리히 니체]: 아아, 데카르트! 그 창백하고 병약한 이성주의자! 그가 싸질러 놓은 독버섯이 오늘날 온 세상을 덮고 있구나! 김어준, 자네의 질문에 답하자면, 그것은 단절이 아니라 악취 나는 부패의 '완성'이오! 코기토는 생명력 넘치는 육체를 부정하고 인간을 대가리만 둥둥 떠다니는 유령으로 만들어버렸소. 모든 것을 의심한다는 그 병적인 회의주의, 그리고 결국 '생각하는 나'만이 진리라는 그 지독한 오만함! 이것이 바로 서구 철학의 가장 큰 재앙이었소. 오늘날 스마트폰을 들고 타인을 감시하고 자신을 전시하는 저 자의식 과잉의 찌질이들은, 육체적 본능과 대지의 힘을 잃어버린 채 오직 '관념'속에서만 생존을 확인하려는 데카르트주의의 가장 천박한 찌꺼기들이오. 그들은 데카르트가 파놓은 함정 속에서, 타인의 인정(좋아요)이라는 썩은 고기를 찾아 헤매는 가련한 노예들에 불과하오!​▶ [임마누엘 칸트]: 이런 무지몽매한 곡해들을 듣고 있자니 철학자로서 참담할 뿐입니다!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오늘날의 병리적 과잉 자의식과 동일선상에 놓는 것은 철학적 무지의 소치입니다. 데카르트가 도달한 코기토는 현상적이고 감각적인 '경험적 자아'가 아니라, 인식의 가장 확고한 토대로서의 '선험적 주체(순수 지성)'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방법론적 회의의 위대한 결실이지,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인정투쟁을 벌이는 지금의 저열한 관종들의 심리와는 완벽하게 '단절'되어 있습니다. 오늘날의 과잉 자의식은 이성이 마비되고 오직 감각적 욕망과 타율성만이 폭주하는 현상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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